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사오카 시키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아명은 도코로노스케(処之助)이며 훗날 노보루(升)로 개명했다. 휘는 츠네노리(常規). 시키(子規)는 결핵을 앓고있던 자신 스스로를 두견새(子規, 호토토기스)에 비유하여 지은 필명이다. 고킨와카슈(古今和歌集)을 부정하고 [[만요슈]](万葉集)를 찬양하였으며, 형식에 얽메여 있던 에도시대까지의 와카를 비판하는 등 자기주장이 강력하고 작품관이 뚜렷하며 활동이 매우 활발한 편이었다. 아키야마 사네유키[* [[아키야마 요시후루]]의 동생으로, 러일전쟁 당시 제2함대를 지휘하여 발틱 함대를 쳐부순 것으로 유명한 일본 해군 제독]와는 고향 친구 관계이며, [[사이토 모키치]], 이토 사치오는 제자이고, [[나쓰메 소세키]]와는 [[제국대학]](현, [[도쿄대학]]) 동창이다[* 본래 사네유키도 시키와 함께 공부해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고자 했지만, 당시 육군 장교였던 형의 권유, 그리고 집안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해군병학료로 진로를 돌렸다고 한다.]. 다만 마사오카 시키는 중퇴했다.[* 철학과에서 국문과로 전과했고 그 뒤 자퇴.] 특히 소세키와는 같은 문학인으로서 굉장히 친밀한 관계였으며, 같은 문학인으로서의 교류도 많았기 때문에, 함께 왕복 서간집을 집필하거나 가끔씩 각자의 작품에 서로를 등장시키기도 하는 등 작품활동 면에서도 서로를 향한 친밀감을 엿볼 수 있다. 1867년에 태어나 1902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[[결핵]]으로 생을 마감했으며, 결핵에 걸리고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.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활을 꽤나 오래 유지했다. 그러나 시키는 투병 중에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고, 신문사 등지에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고 한다. 이 때의 자신의 생활을 그린 병상육척[* 병상의 크기인 6척이 자신에겐 세계의 크기라는 뜻을 담은 제목이다. 한국에도 2014년에 인문사에서 번역되었다.]이라는 저서 또한 유명하다. 젊은 나이였지만 활동이 매우 활발한 편이었기에 문학계에 지인들이 많았고, 투병 생활이 길었던 만큼 소세키를 포함하여 여러 유명한 문학인들이 이따끔씩 병문안을 왔다고 한다. 여담으로 [[야구]]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'야구(野球)'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한 사람이다. 뿐만 아니라 각종 야구용어를 한자어로 번역한(Batter → 타자(打者), Runner → 주자(走者) 등...) 공적을 인정받아 2002년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. [[가마쿠라 막부]] 3대 쇼군으로 생전 금괴화가집이라는 자작시집을 편찬하기도 했던 [[미나모토노 사네토모]]의 와카에 대해 “기존의 명시인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했다”고 평가하고, “사람의 위에 선 사람들이 예술까지 잘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인간성이 바닥을 기기 마련인데, 사네토모만은 예외였다”며, “그가 요절하지만 않았어도 훌륭한 작품을 더욱 많이 써낼 수 있었을 것”이라고 아쉬워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